젊은 느티나무 - 강신재
그는 티셔츠로 갈아입고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들어왔다.
익숙한 발소리, 방 안 가득 퍼지는 비누 냄새,
안락의자에 툭 하고 주저앉거나 창가에 기대어 팔꿈치를 짚은 채 빙긋 웃는 얼굴.
"무얼 해?" 언제나 그랬다.
말투도 태도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알아챘다.
내게 가장 슬프고 괴로운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엷은 비누 향이 퍼지는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릿한 무언가가 일어나곤 했다.
『젊은 느티나무』에서 강신재는 그 감정을 정확히 포착했다.
이삼미터쯤의 거리, 멈춰 선 남자, 자신을 향해 내달리는 듯한 환상,
그리고 사실은 느티나무를 붙잡고 있던 여자.
나는 그 장면을 필사하면서 문득 현실의 나를 떠올렸다.
그도 그랬고, 또 다른 그는 더욱 그랬다.
며칠 전부터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나에게 두 남자가 동시에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하나는 회사의 그 사람, 또다른 남자는 새아버지의 아들이자 나의 첫사랑이기도 했던 중학교 동창.
나는 일을 하다 말고, 밥을 먹다 말고, 필사를 하다 말고,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하필 지금일까. 왜 둘 다, 동시에, 이렇게 내게 다가오는 걸까.
가정의 달이자 무슨무슨 행사가 많은 5월은 총무부가 가장 바쁜 달이다. 소득세 신고, 결산 자료 정리, 각종 회계 마감 일정들이 정신을 쏙 빼놓는다. 업무에 몰두하다 보면 끼니를 거르는 일도 종종 생긴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그 사람이 나타난다.
내 입맛에 맞는 샌드위치나 시원한 라떼를 슬그머니 책상 위에 놓고 간다.
말없이 웃는 얼굴, 지나치게 다정한 눈빛.
그 친절함에 나는 미소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한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적당한 선을 넘지 않으려 애쓴다.
야근을 마치고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이번엔 동창생이 서 있다.
언제부터 기다렸냐 물으면, 대충 웃으며 "좀 됐어"라고 말한다.
같이 걷고, 지하철을 타고, 우리 집 근처 정류장에서 조용히 작별 인사를 나눈다.
그도, 지나치게 다정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 익숙한 사람처럼, 너무 오래된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저 자연스럽게 곁에 있는 사람. 나는 그런 방식이 조금 더 편하다.
두 사람 모두 나의 호위기사를 자처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누구의 손도 잡지 않는다.
그들의 진심이 어디를 향하는지, 나를 향한 것이긴 한지,
아니면 외로움을 덜어줄 누군가를 찾는 것뿐인지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또 상처받는 일이 두렵다.
한번 깨진 유리잔은 다시는 원래대로 붙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담백함을 유지하려 애쓴다.
마음을 다 주지 않고도 따뜻할 수 있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나는 오늘도 그들과 평행선이다.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거리.
누군가는 이 상태를 답답하다고 말하겠지만, 내겐 오히려 이 간격이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렇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나는 나를 지켜낸다.
젊은 느티나무를 붙잡듯,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으로.
오늘의 필사는 내가 잊고자했던 감정을 다시 데려왔다.
그를 더 사랑해도 되는 것이라는 문장.
나는 그 문장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과연, 나는 지금 누군가를 더 사랑해도 되는 걸까.
아직은 자신이 없다. 그렇기에 오늘도 웃음으로 침묵을 덮고, 다정함 대신 조용한 안녕을 남긴다.
그러니까 지금 이 감정은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직은 그저, 사람 사이의 온기에 기대고 싶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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