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 여행의 기술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 필사 구절
여인숙 주인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비는 줄기차게 내렸고,
그 때문에 떡갈나무들은 하나의 덩어리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떡갈나무 잎들이 타닥타닥 떨어지며 화음을 만들었다.
큰 잎에 떨어지는가 아니면 작은 잎에 떨어지는가,
높은 잎에 떨어지는가 아니면 낮은 잎에 떨어지는가,
물이 고인 잎에 떨어지는가 아니면 텅빈 잎에 떨어지는가에 따라
빗소리는 다르게 들렸다.
이 나무들은 질서가 잡힌 복잡성의 상징이었다.
– 알랭 드 보통,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
오랜만에 엄마 집에 왔다.
지난 명절에도 오지 않았으니, 햇수로 따지면 거의 1년 만의 방문이다.
엄마는 내가 대학생이 되던 해에 재혼했다.
새아버지는 엄마의 초등학교 동창이었고,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 엄마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식당 단골 손님이기도 했다. 엄마가 식당을 접고 새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던 날, 나는 혼자 원룸을 구해 집을 나왔다.
그때부터 혼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엄마가 나를 버린 것 같았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믿어야 내 마음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르바이트로 늦게 돌아온 밤, 문 앞에 놓인 반찬 더미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무너졌다.
세상의 무용한 것 중 가장 나를 갉아먹는 것은 사람의 감정이란 걸, 나는 깨달았다.
회사에서 선배와 트러블이 있었다.
돌아보면 내가 예민했다.
자꾸만 무너지는 마음의 줄을 붙잡고 싶어서였다.
썸남을 정리하겠다고 다짐한 날부터 나도 모르게 손끝이 까칠해졌고, 마음은 갈피를 잃었다.
현실이 버겁게 느껴졌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연차를 냈고, 그렇게 나는 그동안 일부러 가지 않았던 엄마 집으로 도망쳤다.
늘 그랬듯이 엄마와 새아버지는 변함없는 따뜻함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여전히 내 방이 존재했다. 당연한 일이다. 엄마집엔 새아버지의 아들 방과 내 친언니의 방도 있다.
물론 언니는 내가 고등학생일 때 결혼했고, 나와 동창인 새아버지의 아들은 아직 이곳에 살고 있다.
나는 내 방으로 거리낌없이 들어갔다. 그 안엔 내가 어릴적 사용했던 옷과 책
그리고 중학교 시절 돌아간 아버지의 유품 중 내가 물려받았던 우표수집 앨범과 해외여행 기념 엽서 등등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유품들 사이에서 단연 내 눈에 띈 것은 책상 서랍에 고이 모셔진 금색 도금 만년필이다.
한때는 아버지의 손때마저 닳아질까 아까워 쉬이 만질 수 조차 없었던 만년필을
나는 가만히 잡아보았다가 다시 내려 놓았다.
이젠 하다하다 만년필까지 무겁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않고 내 방이라는 곳을 나왔다.
엄마 집은 작은 정원이 있는 주택이다.
비가 쏟아지던 그날, 테라스에 앉아 빗속에 젖는 측백나무를 바라보며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큰 잎 위로, 작은 잎 위로, 그리고 고인 물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그리고 오랜만에 방문한 자식을 위한 두 분의 분주한 소리,
비 냄새와 맛있는 냄새, 이 모든 게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내 안의 복잡한 감정처럼 다채롭고 조용했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질서가 잡힌 복잡성.
나무들이 들려주는 그 화음 속에서 나는 비로소 마음의 복잡함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엄마 집을 갈 때마다 낯설다.
하지만 그 낯섦마저도 언젠가는 익숙해질 것이라는 걸,
그리고 내 마음도 언젠가는 비처럼 깨끗이 씻길 날이 올 거라는 걸,
그날의 빗소리는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나뭇 잎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처럼, 내 마음의 무게도 조금은 가벼워졌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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