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안식의 공간이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
“일상사가 번다하고 골치 아플수록 여행지의 호텔은 더 큰 만족을 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문제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나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만 같다.”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이 문장을 필사하며 문득 그를 떠올렸다.
첫사랑이자 남매지간이 되어버린 동창생. 얼마 전 그가 내게 물었다.
“요즘에도 필사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약간 웃으며 말했다.
“그때 너, 필사한 노랫말 다이어리에 붙여서 줬었잖아. 아직도 그거 갖고 있어.”
그의 말은 오래된 서랍을 여는 열쇠 같았다.
그 다이어리,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엄마의 재혼으로 집을 나올 때, 나는 거의 모든 유년의 물건들을 버리고 나왔다.
어릴 적 내게 유일한 피난처였던 아버지의 만년필도, 필사노트도, 모두 그 집에 두고 왔다.
남긴 것도, 가져온 것도 없이.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나를 무너뜨렸다.
내가 그렇게나 버리려 애썼던 시간들을, 그는 고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를 좋아했지만 내 감정의 민낯을 들키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괜히 쌀쌀맞게 굴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내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곁에 있어 주었고, 말없이 내 옆을 지켰다.
중학생 시절, 나는 교과서 속 시구나 노랫말을 필사했다.
주말이면 집에 있기가 싫어 서점에 앉아 책을 베껴 쓰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옆에 앉아 책을 읽거나 문제집을 풀며 기다려주었다.
그는 훈계하지 않았고, 나를 판단하지도 않았다.
그냥 내가 베껴 쓰는 문장들의 리듬 속에서 천천히 감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그는 나의 필사 노트를 지켜주던 유일한 사람 같았다.
그래서 지금 돌이켜보면, 그는 내게 호텔 같은 존재였다.
익숙하지만 새롭고, 잠깐 머무는 동안이라도 나를 리셋시켜주는 공간.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만났는데도, 그의 앞에서 나는 늘 새로웠다.
그가 내게 왜 그렇게까지 따뜻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필사를 한다는 건, 과거를 꺼내어 현재의 감정과 마주하는 일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바라보면서,
그 시간을 지났기에 지금의 나를 이해하는 과정.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를 용서한다.
지금도 나는 필사를 한다.
문장을 따라 적는 손끝에서, 오래전 기억들이 피어나고, 억눌렀던 감정들이 조용히 다시 살아난다.
그렇게 한 문장씩 적어나가는 동안, 나는 다시 숨을 쉰다.
그리고 마음 한가운데에 문장을 새긴다.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도 여행을, 아니, 리셋을 갈망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언제나, 한 문장, 한 필사의 순간에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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