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 조용하게 무너지고 싶지 않아서
한강 『채식주의자』와 나
오늘도 책 한 권을 펼친다.
무엇을 잊고 싶거나, 아니면 오히려 다시 떠올리고 싶을 때 나는 필사한다.
특히 한강의 글은 언제나 마음 깊은 곳을 찌른다.
너무 날카롭지도 않고, 너무 직접적이지도 않지만 분명히 나를 건드린다.
오늘은 『채식주의자』의 한 문장을 필사했다.
“나는 그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조용해서, 처음에는 그것이 소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 한강, 『채식주의자』
책장을 덮은 후에도 그 문장이 한참 동안 가슴에 남아 있었다.
‘무너지는 소리’라는 말이 이토록 조용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도 요즘 그런 소리를 듣고 있다.
내가 관심있는 사람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썸을 타고 있다.
어쩌면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지만, 확신은 없다.
확신 없는 마음은 항상 사람을 조심스럽게 만든다.
나의 말 한마디, 카톡의 텍스트 하나에 지나치게 신경이 쓰이고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부담을 줄까 봐, ‘적절한 선’을 유지하려 한다.
그런데 조심하다 보니, 나 자신도 점점 작아진다.
말을 아끼고, 감정을 감추고, 괜찮은 척을 한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무도 모르게 무너지는 소리가, 지금 내 안에서 나고 있다는 걸.
감정을 감춘다고 사랑이 되는 건 아니다.
관계는 언제나 불안하다.
사랑을 시작하기 전의 그 어정쩡한 순간들은 특히 그렇다.
상대의 온도를 재느라 내 온도가 식어가는 건 아닐까?
그런 나에게 한강의 문장은 경고처럼 느껴졌다.
“너, 지금 너무 조용하게 무너지고 있어.”
“너 자신을 잃고 있어.”
그 문장을 쓰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조용히 무너지는 대신, 조용히 나를 붙잡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필사한다.
글을 따라 쓰며 마음을 정리하고,
문장 속에 내 감정을 담아본다.
이건 단순한 독서가 아니다.
이건 나를 지키는 일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면서도,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한 작은 몸짓.
📌 오늘의 필사
“나는 그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조용해서, 처음에는 그것이 소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 한강, 『채식주의자』
🖋️ 다짐
조용히 무너지지 말자.
사랑 앞에서도, 감정을 잃지 말자.
감춘다고 가까워지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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