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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의 숲에서 부는 바람

필사-『그 여자, 전혜린』 정도상

by misty sky 2025. 5. 22.

 

실컷 살지 못한 사람의 사랑

 

그여자 전혜린
그여자 전혜린 표지

 

 

“사람들은 한때 나를 천재라고 불렀다.
남학생들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서울 법대에 당당하게 합격했을 때부터 붙은 칭호였다.
그러나 나는 천재가 되고 싶었지만, 천재는 아니었다.”

 

어릴 적 나는 천재가 되고 싶었다. 남들이 인정해주는 사람, 부러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건 상처 많은 사람들의 서툰 갈망에 지나지 않았음을 안다.

‘잘난 사람’보다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실컷 살지 못했어. 생을 사랑해.

 

이 문장을 필사하는데 유독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전혜린의 죽음은 ‘살고 싶지 않음’이 아닌 ‘실컷 살지 못한 절망’이었으리라.

살고 싶었지만 살 수 없었던 시간들.

사랑하고 싶었지만 끝내 닿지 못했던 손끝. 나도 그런 순간들을 살아내고 있었다.

 

“나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생명이 유동하는 것이었다.
매일의 삶이 변하고, 어떤 새로운 것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숨 쉬는 시간은, 필사적으로 필사하는 이 30분 남짓한 시간이다.

이 시간이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믿는다.

 

“나는 가끔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날 아침의 기분일 뿐이다.
나는 끝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하루를 시작한다.”

 

오랜만의 대학 동기 모임에서 화제는 언젠가 삭제해버린 내 SNS였다.

누군가의 ‘완성된 삶’이 떠다니는 공간에서,

나는 나조차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어 있었다. 

동기들의 질문에 나는 ‘관리가 잘 안 돼서’라고 둘러댔다.

사실은 보이고 싶은  삶이 없는것도 있지만,

누군가의 삶을 습관적으로 엿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작 사진 한장 문장 몇 줄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설레발을 치고 싶지 않기도 했고.

 

“현재 처해 있는 조건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건 비극이었다.
그것은 현실의 조건을 무시하지 못하는 비극이었지만,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랑의 비극은 사랑 그 자체에 존재하는 거였다.”

 

동창생과 나는 이따금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음에도,
어떤 이름도 붙이지 못한 채 관계를 유지해왔다.
사랑이라고 확언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전혀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사랑은 때로 존재 자체만으로 비극이 된다.
그것이 얼마나 맑고 따뜻하든 간에.

 

그날, 대학 동기들과의 모임에서 그가 고깃집에 있었다.
어쩌면 내 인생의 가장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동기들에게 그를 소개하는 순간,
내가 그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숨기고 싶은 마음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엉켜버렸다.

 

 

“나는 진정으로 사랑을 믿었다.
그러나 사랑은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을 믿었다.”

 

 

동창생을 향한 내 마음은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고
어디에도 정확히 적어둘 수 없는 감정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리기엔 조심스럽고,
관심이라기엔 너무 오래되고 깊은.

 

그날 밤, 단톡방에서 동기들이 그에 대해 떠드는 걸 보며
나는 가만히 손을 움켜쥐었다.
누군가에겐 ‘잘생긴 남자’일 뿐이지만,
나에겐  모든 순간을 견디게 해주는 한 사람이었다.

 

“사랑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나는 묻는다. 아니, 나는 안다. 지금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다만, 그를 향한 내 마음 하나 때문이다.

내가 아직 실컷 살지 못했지만, 실컷 사랑하고 있다.


그여자 전혜린 필사
그여자 전혜린 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