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술에 취해서도 예의 바른 젊은이가 아니라, 부당한 실존에 항거하는 외로운 병사 같았다.
저 남자는 참 외롭게 살았겠구나 싶었다.
외롭고 꼿꼿하게,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세상을 걸어가자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사랑은 어떤 찬란한 거짓말의 형식으로 환생의 기적을 노래한다.
"내 인생에서 당신은 이전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
— 그 말은 너를 만나기 전의 내가 없었다는 뜻이고,
너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쌓인 끝에서 나오는 말이다.
사랑은 철저하게 현재형이며, 그러므로 언제나 아슬아슬한 찰나의 예술이다.
진심일 수도,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 순간만은 누구보다 간절한 나의 구애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고, 누군가의 마음에 내 자리를 내어주고 싶었다.
그 마음은 언제나 고요하지 않았고,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무너졌다.
사랑이 있는 게 다행이라고 믿고 싶다. 사랑은 약하지 않다.
약한 건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다.
엄마에게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 ‘미안해.’
그 말 한 마디를 듣고 싶어 했던 나는 어쩌면 늘 그 말 하나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빠를 갑작스레 잃고 중학생이 되어버린 어느 날부터,
세상 모든 책임이 낯설고 버거운 나에게 쏟아졌을 때도,
엄마는 늘 당연하다는 듯 내 어깨에 무게를 올려놓았다.
그 무게를 설명하지도 않았고, 덜어주지도 않았다.
나는 엄마의 선택을 용서하지 못했다.
친가와 단절하고, 보험금을 둘러싼 억측과 감정을 내세우며
내 삶의 방향을 오로지 그녀의 판단으로만 결정한 것.
내가 엄마 딸이 아니길 바란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엄마는 모를 것이다.
사랑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사랑은 곧잘 사람을 외롭게도 만든다. 나를 외롭게 만든 건, 바로 그런 사랑이었다.
이틀 전, 내가 친구로만 지내자며 거칠게 밀어낸 첫사랑이 밤 늦게, 술에 취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 문 앞에서 망설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취기에 젖은 어눌한 목소리로, 단 하나의 문장만 남겼다.
"너 편할 대로 해. 나는 여기 그대로 있을게."
나는 그 말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가 보인 강한 의지는, 나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또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는 울지 않았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단지 그대로 서서, 내게 사랑을 건네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를 안고 울었다.
말로는 밀어냈지만, 마음은 도망칠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를 대신해 울어주는 것이었다.
외롭게 꼿꼿하게 서 있던 그를 품에 안고, ‘괜찮다’는 말 대신 눈물로 전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누군가에게 건네면서, 나를 위로하는 것.
엄마에게 들을 수 없었던 ‘미안해’를, 그에게서 듣는 ‘괜찮아’로 대신하며, 나는 어른이 되어간다.
어쩌면, 나의 삶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찾아가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그 말이 타인의 입을 통해 오지 않더라도, 내 입술로 누군가에게 내어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내 마음의 구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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