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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그 여자, 전혜린』 정도상 실컷 살지 못한 사람의 사랑 “사람들은 한때 나를 천재라고 불렀다. 남학생들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서울 법대에 당당하게 합격했을 때부터 붙은 칭호였다. 그러나 나는 천재가 되고 싶었지만, 천재는 아니었다.” 어릴 적 나는 천재가 되고 싶었다. 남들이 인정해주는 사람, 부러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그런데 살다 보니 그건 상처 많은 사람들의 서툰 갈망에 지나지 않았음을 안다.‘잘난 사람’보다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실컷 살지 못했어. 생을 사랑해.” 이 문장을 필사하는데 유독 시간이 오래 걸렸다.전혜린의 죽음은 ‘살고 싶지 않음’이 아닌 ‘실컷 살지 못한 절망’이었으리라.살고 싶었지만 살 수 없었던 시간들.사랑하고 싶었지만 끝내 닿지 못했던.. 2025. 5. 22.
필사-[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해도]이치조 미사키 다정한 사람은, 기억 속에서도 웃고 있다“잘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게 훨씬 어렵다.” 그 문장을 읽으며 오래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얼마나 다정한 사람일까.그리고 나는 얼마나 다정한 사람을 만나왔던가. 그 질문 앞에 떠오른 얼굴이 있다.고생한 흔적이 얼굴에 고요히 스며들어 있었지만, 조금도 비뚤어지지 않았던 사람.누군가에게 상처받았을 법한 순간에도,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던 사람.나보다 더 아팠을지도 모르는 그가 나를 향해 웃을 때, 나는 조용히 무너졌다. “이 애는 어째서 이렇게 다정한 걸까.” 어제의 내가 느낀 것을 오늘도 느낀다.내가 중요한 것을 잊어도, 말하지 않아도, 그 애는 신경 쓰지 않고 오늘 또 다정하다.매번 같은 말투로, 같은 눈빛으로 나를 안심시키며 다가온다.아무 일도.. 2025. 5. 20.
필사-구의 증명 (최진영) 사랑하다 죽어버릴지도 몰라 너는 알까?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 모를까? 네가 모른다면 나는 너무 서럽다. 죽음보다 서럽다. 너를 보지 못하고 너를 생각하다 나는 죽었다. 좀 더 일찍 왔어야했다. 내가 본 마지막 세상은 너여야 했다 죽음보다 서럽다는 말이, 뼈에 사무친다.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한동안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너무 서러워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선 나도 언젠가 저렇게 무너질 것 같아서.나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어쩌면 평생 그렇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얼마 전 그가 내 방에 와 술에 취해 잠들었다.나는 그의 잠든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다 큰 어른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 놀이터에서 웃던 아이처럼 보였다.그날의 그는 해맑았다.그리고 나는 미쳐 울지도 못했다.그.. 2025. 5. 19.
필사-『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정희재 남자는 술에 취해서도 예의 바른 젊은이가 아니라, 부당한 실존에 항거하는 외로운 병사 같았다.저 남자는 참 외롭게 살았겠구나 싶었다.외롭고 꼿꼿하게,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세상을 걸어가자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사랑은 어떤 찬란한 거짓말의 형식으로 환생의 기적을 노래한다."내 인생에서 당신은 이전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 그 말은 너를 만나기 전의 내가 없었다는 뜻이고,너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쌓인 끝에서 나오는 말이다. 사랑은 철저하게 현재형이며, 그러므로 언제나 아슬아슬한 찰나의 예술이다.진심일 수도,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 순간만은 누구보다 간절한 나의 구애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고, 누군가의 마음에 내 자리를 내어주고 싶었다.그 마음은 언제나 고요하지 않았고, 때로는.. 2025. 5. 18.
필사-「두 번은 없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아무런 연습 없이 죽는다.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여름에도 겨울에도낙제란 없는 법.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미소 짓고.. 2025. 5. 17.
필사-『패싱』 넬라 라슨 아이린은 빈정거리는 기색을 모른 척했다. 상대의 말 속에 든 사무친 저항감이 그녀 자신의 눈에도 눈물을 고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우는 것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클레어처럼 매력적으로 우는 여자는 드물다고, 그녀는 생각했다.“난 믿기 시작하는 중이야.”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누구도 완전히 행복하거나 자유롭거나 안전하지 않다고.”그녀는 다르지만 같은 종류의 두 신의 사이에 붙들려 있었다. 그녀 자신, 그녀의 인종, 인종! 그녀를 구속하고 억누르는 것. 어떤 조치를 취하든, 전혀 취하지 않든, 뭔가는 무너질 것이다.벽난로 불빛이 아늑한 조용한 거실에 홀로 앉아 아이린 레드필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흑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랐.. 2025.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