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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웃고 또 웃어야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웃고 또 웃어야 겨우 한 번 울 수 있는 생“하루에 사십이해일천이백만경 번 이산화탄소를 배출해내는 인간들로 가득찬 이 지구에서도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이 180이라는 숫자 때문이다.인간만이 같은 종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만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앞으로 네게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테고 그 중에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 일어나기도 할 텐데,그럼에도 너라는 종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한 번 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얘기다.이 사실을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된다.”—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회사로 돌아왔다. 익숙한 키보드 소리, 끝없는 메신저 알림, 회계 정산, 문서 출력, 전화 응대…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 2025. 4. 30.
📚 필사 -눈꽃과 침묵 사이에서(곽재구-사평역에서) 곽재구 · 「사평역에서」 필사“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빗물이 순식간에 우박으로 바뀌었다. 나는 허겁지겁 지하철 역사로 달려갔다.후두두두 무섭게 떨어지는 진주알 같은 우박이 땅바닥을 구르고 튀어오르는 게 여간 낯설지가 않았다. 역 안에 들어가자 저다마 옹송그리며 선 인파를 보자니 나도 모르게 『사평역에서』라는 시가 생각났다. 언제 읽어도, 눈처럼 싸륵싸륵 내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시다. 지하철에 올라 메모장에서 이 시를 발견한 나는 오래도록 시를 음미했다.그러다 습관처럼 그의 SNS를 열었다.그저 ‘무슨 일 없나’ 정도의 가벼운 클릭이었지만, 화면이 뜨자마자 나.. 2025. 4. 29.
📚 필사-빗물에 젖은 정원 (알랭 드 보통-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 여행의 기술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필사 구절여인숙 주인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비는 줄기차게 내렸고,그 때문에 떡갈나무들은 하나의 덩어리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떡갈나무 잎들이 타닥타닥 떨어지며 화음을 만들었다.큰 잎에 떨어지는가 아니면 작은 잎에 떨어지는가,높은 잎에 떨어지는가 아니면 낮은 잎에 떨어지는가,물이 고인 잎에 떨어지는가 아니면 텅빈 잎에 떨어지는가에 따라빗소리는 다르게 들렸다.이 나무들은 질서가 잡힌 복잡성의 상징이었다.– 알랭 드 보통,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오랜만에 엄마 집에 왔다.지난 명절에도 오지 않았으니, 햇수로 따지면 거의 1년 만의 방문이다.엄마는 내가 대학생이 되던 해에 재혼했다.새아버지는 엄마의 초등학교 동창이었고,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 엄.. 2025. 4. 28.
필사-떠나고 싶은 마음, 버스를 놓친 뒷모습처럼(은희경-새의 선물) 은희경 『새의 선물』과 나, 그리고 오해의 끝에서 마주한 착각“저만치 버스가 멀어진 뒤 비로소 먼지가 가라앉는다.그런데 그 먼지 속에 아줌마가 여전히 서 있다.” 언젠가 나도 버스를 놓쳐 본 적이 있다.버스는 가고, 나는 남는다.그런데 은희경의 문장처럼, 문제는버스를 놓친 사실보다도 그 순간의 정지된 내 마음이다. 오늘 그가 다른 직원에게 돈가스를 잘라주는 걸 봤다.물티슈를 건네고, 음료를 챙겨주고, 웃으며 대화하는 그의 모습은,정말이지 익숙했다.내가 받았던 친절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내게만 특별히 보였던 그 작은 배려들을혼자만의 시그널로 믿었다.착각이었다."아줌마는 갈 곳이 있는 게 아니었다.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었다."버스를 놓친 아줌마처럼, 나도 오늘 마음이 한 자리에 멈춰섰다.그는.. 2025. 4. 27.
필사-가벼운 마음(크리스티앙 보뱅) 📖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그를 마주하는 순간처럼– 크리스티앙 보뱅 『가벼운 마음』과 나, 그리고 회색빛 회사 안의 미묘한 온기"당신도 볼 수 있듯,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하루 종일 반복되는 회의와 결재 서류들 속에서도,잠깐의 커피향이나 짧은 메시지 한 줄이 마음을 덜컥 흔들 때가 있다.나는 총무부에 있고, 그는 옆부서인 행정섭외부에서 일한다.나보다 두 살 어리고, 키도 크고, 잘생기고, 일머리도 있어서 회사에서 꽤 인기가 많다.하지만 내 눈에는 그런 외적인 조건보다도,그가 사람을 대할 때의 적당한 거리감과 예의, 그 안에 숨겨진 조심스러움이 더 깊게 들어온다.요즘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을 주고받는다.대부분 업무에 관한 이야기지만, 가끔은 커피를 대신 사주기도 하고,식당 앞에서 우연한 듯 .. 2025. 4. 27.
필사-채식주의자(한강) 📖 너무 조용하게 무너지고 싶지 않아서한강 『채식주의자』와 나 오늘도 책 한 권을 펼친다.무엇을 잊고 싶거나, 아니면 오히려 다시 떠올리고 싶을 때 나는 필사한다.특히 한강의 글은 언제나 마음 깊은 곳을 찌른다.너무 날카롭지도 않고, 너무 직접적이지도 않지만 분명히 나를 건드린다.오늘은 『채식주의자』의 한 문장을 필사했다.“나는 그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그것은 너무나 조용해서, 처음에는 그것이 소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한강, 『채식주의자』 책장을 덮은 후에도 그 문장이 한참 동안 가슴에 남아 있었다.‘무너지는 소리’라는 말이 이토록 조용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나도 요즘 그런 소리를 듣고 있다.내가 관심있는 사람이 있다.정확히 말하면, 썸을 타고 있다.어쩌면 그 사람.. 2025. 4. 26.